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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라는 마지막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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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라는 마지막 기차

AI 붐은 평생 한 번 올 마지막 부의 축적 기회이며, 그 이후에는 돈 자체가 의미를 잃을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묘사한 실리콘밸리의 풍경은 흡사 SF 소설 속 ‘기이한 종말론’을 닮아 있다. “영구적 하층민(permanent underclass)으로 전락하기 전의 마지막 기회”라는 서늘한 경고가 스타트업 현장을 지배한다. 일론 머스크는 AI가 모든 것을 자동화해 물질적 풍요가 지배하는 시대가 오면 돈의 용도 자체가 불분명해질 것이라 예언한다. 그럴수록 가치가 오르는 것은 부동산이나 예술 같은 복제 불가능한 ‘희소 자산’뿐이라는 논리다.

이 거창하지만 막연한 서사는 바다 건너 한국에 도착해 더 구체적이고 절박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AI는 먼 미래의 철학적 고민이라기보다, 이미 놓친 자산 상승의 기회에 대한 보상 심리와, 일자리뿐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에 내 자리를 지키려는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상처가 만든 기시감: “부동산도 놓쳤는데, AI마저…”

한국 투자자들, 소위 ‘서학개미’들의 미국 주식 투자는 매우 공격적이다. 새해가 시작되고 불과 보름 남짓한 기간에 미국 주식 투자액은 80억달러 이상 늘어났다. 시기를 넓혀 미국 주식 보관액 추이를 보면 2022년 말 442억달러 수준에서 2024년 말 1,121억달러로 급등했고, 작년 말에는 1,636억달러로 1년만에 600억달러 가까이 늘었다.

테슬라, 엔비디아, 알파벳, 팔란티어, 애플, 이렇게 AI와 빅테크 주요 기업들이 미국 주식 보유 ‘톱5’에 이름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레버리지 ETF 등 고위험·고배율 상품으로 리스크가 큰 상품에도 투자가 쏠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작년 한국은행조차 ‘개인투자자는 다른 나라 투자자에 비해 레버리지 투자에 집중하는 등 과도한 리스크 추구 성향도 보인다’고 우려를 표했다.

한국인의 AI 투자 열풍은 과거의 상처 위에서 자라난 듯 보인다. 2020~2021년 부동산 광풍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에게 자산 시장 낙오는 단순한 손해를 넘어 실존적인 위협이었다. 실리콘밸리 내에서 “이 시기를 놓치면 사다리가 끊긴다”며 극도로 불안한 심리는 오래 전부터 한국 사회에 만연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인들이 단순히 ‘부동산 파도를 놓쳤기 때문에’ AI 투자에 몰리는 건 아니다. 부동산 트라우마는 더 깊은 구조적 문제의 표면이다. OECD 최장 노동시간, 세대 간 자산 격차 심화, 양극화 심화 속에서, 한국인에게 ‘자산’은 단순한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의 유일한 대체재가 되고 있다. 이전에는 부동산이 그 역할을 했고, 이제 주식이 그 자리를 넘보고 있다.

노동의 재편: 도구의 진화인가, 인간의 소외인가

그렇다고 한국인의 AI 열풍을 단순히 투자 열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얼마전 Microsoft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 하반기 기준, 3개월 만에 생성형 AI 사용률은 약 25.9%에서 30.7%로 늘었고 2024년 10월에 비하면 사용자 규모가 80% 이상 증가했다. 그 결과 AI 확산 글로벌 순위가 25위에서 18위로 7계단 올라, 한국은 조사 대상국 중 가장 큰 ‘점프’를 했다.

Microsoft는 ‘왜 한국에서 생성형 AI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쓰이게 되었는지’를 정책, 기술, 문화 이렇게 세가지로 꼽는다. 적극적인 국가 AI 정책과 한국어 성능이 좋아진 AI 모델, ‘지브리 스타일 이미지’ 유행으로 낮아진 AI 활용 장벽. 다 맞는 말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생성형 AI 활용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심리 아래에 있지 않을까.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은 ‘생산성 향상’을 추구해왔다. 그리고 생성형 AI이 등장한 이후로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자격 요건’으로 다가오고 있다. 퇴근 후에도, 혹은 출근 전에도 AI 툴을 익히는 직장인들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실리콘밸리 엘리트들의 담론보다 처절하다. 기술의 속도가 인간의 노동 가치를 앞질러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

한국의 높은 AI 도구 수용률은 ‘혁신을 사랑하는 문화’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 경쟁 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한 군비경쟁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는 더 가벼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무겁게 짓눌리는 시스템 안에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AI라는 지지대를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풍요의 예언 뒤에 숨은 실체

일론 머스크의 말대로 정말 AI가 모든 것을 자동화해 ‘돈’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풍요의 시대에도 ‘희소한 것’의 가치는 더 빛나기 마련이다. 실리콘밸리의 AI 부호들이 역설적으로 다시 부동산으로 몰리며 성벽을 쌓는 현상은 상징적이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이 소란스러운 풍경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유행(FOMO)이 아니라, 가치가 재편되는 세상에서 ‘나의 몫’과 ‘나의 주권’을 확보하려는 전쟁이다.

나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기업을 나온 호기로움은 치솟는 주식 차트 앞에서 작아지고, 난방비와 병원비 문자를 받을 때 불안감은 실체가 된다.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이 AI 이후의 인류 문명을 걱정할 때, 나는 오늘의 통장 잔고와 내일의 생산성부터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이 불안의 속도가 기술의 속도보다 빨라질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다.